저격능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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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격능선 전투는 1952년 10월, 한국 전쟁 중 철원-김화 지구에서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유엔군이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벌인 고지 쟁탈전이다.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작전 지시에 따라 국군 제2사단이 저격능선을 공격 목표로 삼았고, 중공군 제15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국군 제2사단은 6주간의 전투 끝에 저격능선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승리는 휴전 회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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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능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저격능선 전투 |
전역 | 한국 전쟁 |
시기 | 1952년 10월 14일 ~ 11월 25일 |
장소 | 강원도 김화군 김화읍 |
결과 | 국군 제2사단의 승리, 중공군의 공격으로부터 방어 성공 |
교전 세력 | |
유엔군 | |
지휘관 | |
유엔군 | 정일권 중장 |
중공군 | 진기위 |
병력 규모 | |
유엔군 | 제2사단 |
중공군 | 제15군 |
사상자 규모 | |
유엔군 | 전사 1,096명, 부상 3,946명, 실종 97명 |
중공군 | 전사 (추정) 14,795명, 포로 72명 |
2. 배경
1952년 10월, 중공군이 전초진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격하자, 미군 제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잡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쇼다운 작전(Operation Show Down)'이 시작되었고, 미군 제7사단은 삼각고지를, 국군 제2사단은 저격능선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저격능선 전투는 크게 국군의 선제공격, 중공군의 역습, 그리고 반복적인 역습과 진지 사수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중공군 제15군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3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중 제45사단이 저격능선에 전초진지를 설치하고 경계부대를 배치했다.[1] 이들은 중대 규모였지만, 사단 및 군단급 병력 지원이 가능했다.[1]
1952년 철원-김화 지구에서 미군 제9군단은 7월 중순부터 서쪽부터 국군 제9사단, 미군 제7사단, 국군 제2사단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미군 제40사단을 예비로 하여 중공군 제15군, 제38군과 대치했다.[2] 여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가을이 되자 중공군이 제9군단의 전초진지를 공격해, 유엔군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해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2]
제9군단 우익의 미군 제7사단과 국군 제2사단은 김화 지구를 방어했으며, 미군 제7사단은 철원 평야 동쪽 춘가산에서 김화 북쪽 하감령, 국군 제2사단은 하감령에서 동북쪽 하소리까지를 주저항선으로 하고, 오성산을 확보한 중공군 제15군 제45사단과 대치했다.
중공군은 오성산에서 김화로 뻗은 능선상 고지에 전초진지를 설치했는데, 그중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의 전초는 미군 제7사단과 국군 제2사단 전초진지에서 불과 200m 거리여서, 유엔군 진지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었고, 김화 방어에 큰 위협이었다.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내 오성산에서 김화 방면으로 뻗은 능선 중 남대천 부근 해발 580미터, 1km2 정도의 직사각형으로 돌출된 능선이다. 1951년 10월, 노마드선으로 진격하던 미군 제25사단이 이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 제26군의 저격에 큰 피해를 보아 '저격능선'이라 불렸다.
남쪽 A고지, 북쪽 Y고지, 동쪽 돌바위 고지(석암고지)로 이루어진 저격능선은 중공군에게 오성산 방어 요충지였으며, 국군 제2사단에는 주저항선을 조망당하는 위협을 제거하고 오성산 공격 발판이 되는 중요 지형이었다.
국군 제2사단은 1952년 6월 미군 제40사단 담당 정면을 인계받아, 왼쪽부터 제32연대, 제31연대, 제17연대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제37연대를 예비로 두었다.
3. 전투 경과
10월 14일, 국군 제32연대는 Y고지를 탈취했지만, 중공군의 반격을 받아 후퇴했다.[1] 10월 15일에는 제17연대 제2대대가 A고지와 석암고지를 점령했으나, 같은 날 밤 중공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1][2] 국군은 진내 사격을 요청하여 약 6천 발의 포탄을 중공군 진지에 집중시켰고, 10월 16일 새벽에 공격하여 제17연대 제2대대가 A고지, 제32연대 제2대대가 석암고지를 점령했다.[2] 중공군의 반격을 여러 번 격퇴했지만 10월 19일에 철수했다.
10월 20일, 제32연대를 대신하여 제17연대를 투입하여 제1대대가 A고지를 탈환했고, 10월 25일까지 공방전이 계속되었다.[2]
10월 25일부터 제2사단은 미군 제9군단의 지시에 따라 제7사단의 삼각고지를 인계받아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게 되었다. 제2사단은 예비대인 제37연대를 주 저항선 우측의 외야동에 배치하고, 이 지역을 담당하던 제31연대를 삼각고지에 투입했다.
11월 5일, 미 제9군단은 피해가 커 저격능선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삼각고지 공략을 중지했다.
11월 11일, 제2사단은 부대 교대를 실시하여 제17연대를 예비로 돌리고, 제32연대를 저격능선에 투입했다. 같은 날, 대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A고지를 잃고, 수차례에 걸친 반격 작전도 실패로 끝났다. 이후 제32연대를 주 저항선의 방어에, 제17연대를 탈환 임무에 투입하여, 제17연대 제1대대가 즉시 공격을 시작했다. 화력을 집중하여 2시간에 걸친 돌격전을 전개하여 A고지를 탈환했고, 그 기세로 석암고지를 공격하여 이 또한 탈환했다.
11월 13일, 중공군은 대규모 공격 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2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A고지를 공격하여 이를 탈환했다. 제17연대는 제3대대를 투입하여 반격하여 A고지를 확보했지만, 석암고지 확보에는 실패했다.
11월 17일, 제17연대 제2대대는 제1야전포병단의 지원 하에 공격을 시작하여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석암고지를 탈환했다. 이로써 A고지와 석암고지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고, 이후 중공군의 반격으로부터 끝까지 진지를 사수했다.
11월 25일, 저격능선 확보에 성공한 제2사단은 미 제9군단의 명령에 따라 제9사단과 교대하여 군단 예비가 되어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
3. 1. 국군의 선제공격 (10월 14일)
10월 14일 05시, 국군 제2사단은 9개 포병대대의 지원 사격과 함께 제32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여 저격능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제1차 공격).
하지만 제1차 공격은 실패했다.
그리하여 제3대대는 1개 중대를 지원받으며 13시 40분에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미군 전폭기 6개 편대와 국군 제2사단의 9개 포병대대의 집중 포격을 지원받아 공격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제32연대 제3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저격능선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점령한 후, 대대는 Y고지와 돌바위 고지에 각각 1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하여 중공군 역습에 대비하였다.
3. 2. 중공군의 역습 (10월 14일 ~ 10월 19일)
10월 14일 야간, 중공군 제133연대는 강력한 포병 화력과 파상적인 돌격 공격으로 Y고지와 A고지를 집중 공격했다. 치열한 백병전 끝에 국군 제3대대 전술지휘소가 함락되었고, 국군은 돌바위 고지만을 확보한 채 물러났다.[1]
10월 15일, 국군은 예비연대인 제17연대 제2대대를 투입하여 돌바위 고지를 엄호하고, 전폭기 폭격 지원을 받아 오후 2시 30분 A고지를 재탈환했다. 같은 날 밤과 10월 16일 새벽, 중공군 제133연대의 2개 대대가 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중공군 제134연대의 역습도 실패했다.[1]
이후 중공군은 제135연대를 투입, Y고지를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한 후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공격했다.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는 치열한 백병전과 제1대대의 역습에도 불구하고 A고지를 빼앗겼다.[1]
3. 3. 반복적인 역습과 진지 사수 (10월 20일 ~ 11월 25일)
10월 20일 08시, 국군 제2사단장은 제32연대와 제17연대의 임무를 교대하여, 제17연대가 A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제17연대 제1대대는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국군은 그 이후에도 76회의 항공지원을 받아 1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탈환했다.[1]
그 이후, 국군은 중공군의 역습으로 A고지를 피탈당하고, 국군 제3대대 역습과 중공군의 역습과 국군이 다시 A고지 확보로 이어졌다.[2]
10월 25일부터 제2사단은 미군 제7사단의 작전 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됨에 따라, A고지에 대한 방어 작전에 집중하게 되었다. 제31연대를 삼각고지에 배치하고, 저격능선은 제17연대에서 제32연대로 교대하여 제17연대는 예비 임무를 수행했다.
제32연대 투입 이후에도 주간에는 국군이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고, 야간에는 중공군이 역습하는 양상이 반복되었다. 제32연대 제2대대는 병력을 종심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제45사단에서 제29사단으로 교대하여 공격을 실시했지만, 국군 제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3. 4. 미군과의 임무 교대 및 전투 종료
저격능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군단 계획에 따라 국군 제2사단은 미군 제7사단의 작전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에 국군 제2사단은 A고지에 대한 집중적인 방어 작전에 돌입했다. 제31연대를 삼각고지에 배치하여 방어하도록 하고, 저격능선은 제17연대에서 제32연대로 교대하여 제17연대는 예비 임무로 변경되었다.[1]
제32연대 투입 이후에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국군이 주간 작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면, 중공군은 야간 역습으로 대응했다. 제32연대 제2대대는 병력을 종심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제45사단에서 제29사단으로 교대하여 공격을 실시했지만, 국군 제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국군 제2사단은 국군 제9사단에게 임무를 인계하고 군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 정비에 들어갔다.[1]
4. 전투 결과 및 영향
국군 제2사단은 6주간의 장기전 끝에 저격능선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삼각고지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저격능선에서의 승리는 유엔군에게 유리한 전초 기지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기세를 꺾어 전 전선에 걸쳐 주도권을 확보하여 휴전 회담을 유리하게 진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
이 전투에서 당시 2사단장이었던 정일권 중장은 수훈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2]. 제17연대 제2대대장 강두형 소령과 제5중대 강영초 소위에게는 은성 무공 훈장이 수여되었다.
5. 참전 부대
저격능선 전투에는 유엔군과 중공군이 참전했다. 유엔군은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 국군 제9사단은 정일권 중장(10월), 강문봉 소장(11월 1일)이 사단장을 맡았다. 예하 부대로는 제17연대(은석표 대령, 11월 20일부터 김필상 중령), 제31연대(김용순 소령), 제32연대(유근창 대령, 10월 18일부터 강홍모 중령), 제2중포병중대(박재수 대위), 사단 공병대대(김기진 소령)가 있었다. 배속 부대는 제30연대(임익순 대령), 제37연대(김재명 대령), 제53전차중대(조칠성 대위), 제59전차중대(김남수 대위)였다. 제1야포단(박병주 중령)이 화력 지원을 했다.
미군은 루벤 엘리스 젠킨스 중장이 미군 제9군단장을 맡았다. 콜케인 준장이 지휘하는 제9군단 야포단과 제93, 980, 75, 92기갑, 143, 424, 955, 981 야포대대, 제140고사포대대, 제2로켓포대대, 제140전차대대 1개 중대, 군단 화학 박격포대대 1개 중대, 제86공병대 조명중대 제2소대, 군단 대공 사격대 1개 소대가 참전했다.
중공군은 친지웨이가 지휘하는 제15군 예하 제45, 29사단과 리더성 부군장이 지휘하는 제12군 예하 제31, 34사단이 참전했다.
5. 1. 유엔군 (대한민국 국군, 미군)
직책 | 이름 | 비고 |
---|---|---|
군단장 | Reuben Ellis Jenkins|루벤 엘리스 젠킨스영어 중장 | 미군 제9군단 |
제9사단 | ||
사단장 | 정일권 중장 | 10월 |
사단장 | 강문봉 소장 | 11월 1일부터 |
제17연대 연대장 | 은석표 대령 | |
제17연대 연대장 | 김필상 중령 | 11월 20일부터 |
제31연대 연대장 | 김용순 소령 | |
제32연대 연대장 | 유근창 대령 | |
제32연대 연대장 | 강홍모 중령 | 10월 18일부터 |
제2중포병중대 중대장 | 박재수 대위 | |
사단 공병대대 대대장 | 김기진 소령 | |
배속 부대 | ||
제30연대 연대장 | 임익순 대령 | |
제1대대 대대장 | 김영선 소령 | |
제2대대 대대장 | 김상옥 소령 | |
제3대대 대대장 | 조남국 소령 | |
제37연대 연대장 | 김재명 대령 | |
제53전차중대 중대장 | 조칠성 대위 | |
제59전차중대 중대장 | 김남수 대위 | |
지원 부대 | ||
제1야포단 단장 | 박병주 중령 | |
제18포병대대 대대장 | 김하길 소령 | |
제51포병대대 대대장 | 손선양 소령 | |
제52포병대대 대대장 | 하영섭 소령 | |
제53포병대대 대대장 | 권오명 대위 | |
제9군단 야포단 단장 | 콜케인 준장 | 미군 |
제93야포대대 | 미군 | |
제980야포대대 | 미군 | |
제75야포대대 | 미군 | |
제92기갑야포대대 | 미군 | |
제143야포대대 | 미군 | |
제424야포대대 | 미군 | |
제955야포대대 | 미군 | |
제981야포대대 | 미군 | |
제140고사포대대 | 미군 | |
제2로켓포대대 | 미군 | |
제140전차대대 1개 중대 | 미군 | |
군단 화학 박격포대대 1개 중대 | 미군 | |
제86공병대 조명중대 제2소대 | 미군 | |
군단 대공 사격대 1개 소대 | 미군 |
5. 2. 중공군
참조
[1]
웹사이트
Il Kwon Chung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9-06-23
[2]
웹사이트
Too Hyang Kang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9-06-23
[2]
웹사이트
Yoon Cho Kang
https://valor.milita[...]
Military Times
201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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